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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접주 차치구와 그 후 3代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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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에서는 전 동아일보 기자셨던 김화성님의 저서 ‘전라도 천년’중 우리 후암과 인연이 많으신 ‘동학접주 차치구와 그 후 3代’ 에 대한 부분을 발췌해 보았습니다. 해당 내용은 3편으로 나누어 연재 예정입니다. 참고로, ‘전라도 천년’은 전라도 탄생 1,000년을 맞이해, 전라도의 기원부터 전라도가 탄생시킨 인물들과 흥이 넘치는 지역민들의 삶, 생각과 사상, 전라도 자연의 신비로움 등을 소개한 책입니다.


동학접주 차치구와 그 후 3代 1편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一〈신약성경 ‘마태복음 1장'에서〉


신 새벽, 고층아파트 화장실 변기에 앉아 일을 봅니다. 문득 내 머리 위에 누가 앉아있는 것 같습니다. 머리가 지그시 짓눌려 내립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지금 내 바로 위층 누군가가 나처럼 일을 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가 앉아있는 자리는 현재 내가 앉아있는 변기와 정확히 일직선입니다. 그가 뻗고 있는 두 발바닥이 시멘트바닥을 사이에 두고, 내 머리통 위에 정확히 얹혀 있는 것입니다. 오호! 그는 지금 내 머리 위에서 일을 보고 있습니다. 내 위층의 일 보는 사람도, 그 위층의 일 보는 사람 발아래에 있을 것입니다. 그 위층의 사람 또한 그 아래층 사람의 머리에 발을 얹은 채 조간신문을 부스럭거리며 낑낑대고 있을 것입니다. 그 위층의 위층 그리고 그 위층의 위층의 위층도 그러할 것입니다.


고층아파트 화장실에

일렬종대로 앉아있는 사람들

퇴적물처럼 켜켜로 쌓여있는

사람 위에 사람

사람 밑에 사람

스톱모션 스위치를 누르면

딱딱하게 굳어버릴

현생대의 화석

一〈김혜수 ‘404호  3’에서〉


나는 과연 누구의 아들인가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인 5,000년 전 단군할아버지의 아들인가요? 그렇다면 내 머리 위에 아버지는 몇 명쯤이나 될까요? 한 세대가 30년이라면, 5천년 동안 아버지가 160여 분쯤 오셨다 가신 셈인가요? 퇴적물처럼 켜켜로 쌓여. 내 머리 위 일렬종대로 앉아있는 아버지, 아버지화석들. 그렇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떨어뜨린 가랑잎(이성복 시인)’ 한 장일 뿐입니다. 나도 머지않아 내 자식의 ‘아버지화석’이 되어 딱 ‘한 켜’만큼 쌓일 것입니다.

 

차치구(車致九, 1851-1894)는 누구보다도 피가 뜨거웠던 동학 접주였습니다. 삼국지의 장비와 비슷했습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배움은 없었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습니다. 그는 얼굴이 호박만큼 컸고, 기골이 칠 척 거구로 장대했습니다. 그는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보다 네 살이나 많았습니다. 하지만 전봉준의 말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1894년 음력 1 월 녹두장군이 정읍 고부에서 처음 들고 일어났을 때, 농민군 1,200여 명을 이끌고 맨 앞장에 섰던 이가 바로 그였습니다. 그는 전봉준과 거사를 모의한 핵심 20인 멤버였고, 스스로 손여옥(1860~1899)과 함께 정읍두령을 맡았습니다. 동학군에서 정읍두령은 ‘녹두장군 직할부대’였습니다. 황토현전투나 전주성 입성 때 중군으로서 일등공신 역할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전투 때 대패한 것도 그의 부대였습니다.

 

장비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과격했습니다. 양반이고 선비고 단칼에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그는 집강소 시절 정읍지방을 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방수령이나 양반 지주들이 순순히 농민군에게 관아를 내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주, 남원, 운봉 같은 곳은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결국 남원성은 김개남(1853~ 1895) 에게 함락되고 부사 이용헌은 목이 베여 성문 밖에 걸렸습니다.

 

고창 흥덕 현감 윤석진도 완강하게 집강소 설치를 거부했습니다. 되레 집강소를 설치하려던 흥덕접주 고영숙(1871~1894)을 잡아 가둬버렸습니다. 이웃 정읍에서 이 소식을 들은 차치구는 펄펄 뛰었습니다. 그는 바람같이 농민군을 몰고 가서 윤석진을 생포하고 고영숙을 구해냈습니다. 평소 차치구라면 윤석진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영숙이 “굳이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느냐”며 말리자 마지못해 이에 따랐습니다.


1894년 12월 23일(음력 11월 27일) 태인전투 패배를 마지막으로 농민군 주력부대가 해산했습니다. 이제 녹두장군 주위에는 그의 핵심만 남았습니다. 차치구는 전봉준을 그의 집(입암면 대흥리)으로 모신 뒤 그의 곁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전봉준은 입암산성(12월 25일) → 백양사 청류암(12월 26일)을 거쳐 순창으로 향했습니다. 김개남과 만나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1894년 12월 27일(음력 12월 1일) 김개남이 잡혔고, 그 다음날인 12월 28일 전봉준도 붙잡혔습니다. 1월 25일엔 차치구가 그가 살려줬던 윤석진에게 잡혀 그의 칼에 죽었습니다. 이를 갈던 윤석진은 차치구를 개 패듯이 두들겨 패며 닦달했습니다. 차치구는 담담했습니다. “나는 죽을 뿐이다. 더 이상 심문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 다음에 이어서 – 


** 본 글은 저작권자(김화성)의 사전 허락에 따라 발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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